매일묵상

2022-08-11-목요일

사랑목사 2022. 8. 11. 16:00

샬롬! 2022-08-11-목요일입니다

 

인간이 피조물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창조주 되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피조물인 우리들이 처한 불가능의 상황에서 창조주를 향한 “간절한 바램”에서 드러납니다.  

종교학자들은 이것이 종교의 기원이라고 합니다.

 

나에게는 바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욕심이 없음’ 혹은 ‘겸손함’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램이 없다는 것은 교만 중에 교만입니다

 하나님 필요 없다는 것이죠.

마치 자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인양 행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무리들이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는 바라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온전히 부모입니다.

그러기에 아이들은 바라는 만큼 부모님에게 기대며 의지합니다.  

그것이 부모에 대한 아이의 겸손이고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묻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무엇을 바라고 계십니까?  

바라는 내용과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우리의 정체성이 결정되게 됩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에 따라 우리들의 삶의 모양이 달라지고 방향이 달라집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이 아닌 주님께  소망을 구하라고 하시면서

저와 여러분들을 바램의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주님을 찾으라 하십니다.

 

홍해가 앞길을 막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고 요청하십니다.  

갈릴리 바다의 광풍속에서도 주님을 찾으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하고 급해도 먼저 주님의 나라를 바라고 구하라고 명하십니다.

 

바램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램은 어떠한 결과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모든 결과가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

떄로는 바램에 대한 실망과 좌절을 경험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교회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특히나 이민교회에서 사역하다 이리저리 치이고 상처받은 경험이 쌓이다 보면

그저 바라만 보고 나서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결론을 내릴 법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것을 원하실까요? 사랑하는 사랑의 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부흥의 방관자가 한 명도 없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부흥의 역군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한 결과로 상처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늘의 영광이요 면류관일 될겁니다.  

 

저는 저 자신이나 우리 사랑의 교회 성도 분들이 언젠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손끝 하나 다친 곳이 없어 주님께서 만져 주시고 손 봐주실 것이 없는 인생을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상처뿐인 영광”이 아니라 “영광뿐인 상처”의 흔적이 남는 인생을 살고 주님의 손과 발 되어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우리 이웃들을 섬기는 우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흔적! 못자국의 흔적! 오늘 우리들의 하루에 그 흔적을 남깁시다.

 

고의용목사 드림